춘천고등학교 총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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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0년사

전통과 역사의 춘고인이 있는 곳!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아름다운 곳! 1924 춘천고등학교 총동창회

상록회

춘고생의 끈질긴 항일투쟁은 1920년대의 일인교사 배척 맹휴와 만세시위운동에서 1930년대의 상록회운동으로 계승 발전된다. 춘고생의 애국심과 항일투쟁은 내부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춘고생의 항일투쟁 전통이 상록회운동으로 발전함으로써 춘고의 학생민족운동이 교정에서 교정 밖으로, 학생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민족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상록회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1967년 4월에 춘고 교정에 상록탑 건립시 「상록회운동약사」가 저술된 바 있다. 「상록회운동약사」는 다음과 같다


상록회 운동 약사


(1) 서언

폭풍이 불고 눈보라가 쳐와도 이에 굴하지 않고 내일의 새로운 광명을 위하여 천신만고의 역경을 헤쳐가며 피어나는 새싹들의 무서운 신념과 놀라운 생명력이 있음으로써 역사는 끝내 중단되지 않고 더욱 발전하게 마련인 것이다. 일제침략의 마수가 한참 이 영토를 휩쓸어 가혹한 수탈과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던 무렵 충성스러운 젊은 피로 일제와 항쟁하면서 잃었던 조국을 다시 찾으려는 장하고 성스러운 새싹들의 움틈이 있었으니 바로 이 고장에서 일어났던 춘천고보의 상록회운동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순혈(純血)은 조국에 정열은 민족에”란 숭고한 이념아래 민족주의결사 상록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속에서도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널리 고취함으로써 조국광복을 촉진시키려던 이 학생운동이야말로 혹독한 위제(僞製)의 독아(毒牙)에 시달리다 못해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던 이 겨레에게 다시금 기사회생(起死回生) 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과 용기와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던 일대 민족운동의 봉화요 금자탑이었던 것이다. 수년간에 걸쳐 활발하면서도 적극적인 지하운동을 전개하던 끝에 이 움직임은 급기야 교활한 일제에 의하여 발각되는 바 되어 무자비한 고통을 당하고 말았지만 이후 그 훌륭한 독립정신은 역역히 흘러 또다시 후배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승화됨으로써 제이 제삼의 상록회운동이 잇따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학생운동사상 상록회운동이 차지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잃었던 산하를 다시 되찾고 빼앗겼던 국권을 다시 회복한 이 마당에 있어서 불후의 발자취를 남겼던 상록회운동을 회고하고 그 숭고한 정신과 이념을 널리 선양함으로써 자손만대의 귀감을 삼음은 어느 모로나 후학에게 지워진 당연한 의무요 또한 도리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록회운동의 개략적인 사항을 우선 다음에 소개함으로써 이 운동에 관심있는 참고에 공(供)하고져 한다.

(2) 상록회의 태동

1930년대의 초반기에 있어서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한인(韓人)중에는 민족주의자 남궁억선생의 감화를 받거나 「조선의 현재와 미래」 「하루빈 역두의 총성」 또는 「상록수」 「흙」 등의 민족주의적 문헌을 다수 탐독함으로써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고 독립사상을 지니게된 일군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점차 더해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과 탄압정책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토로하지 못한 채 홀로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학생들의 내연심리를 더욱 더 가열시켜 마침내 동지적 결합을 촉진시킨 사건이 있었으니 당시 춘천고보에 재직하던 일본인교사 오카다(岡田)의 한인학생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한민족을 모욕하는 폭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자극되고 분개한 이들 학생들은 점차 이심전심으로 그 결속을 강화하게 되었고 그간 포회(抱懷)했던 사상을 서로 토로함으로써 울적한 심정을 달래곤 했다. 그러던 중 1937년 3월 9일 당시 5학년생이었던 남궁태, 이찬우, 문세현, 용환각, 백흥기, 조규석 등의 6명은 동지를 규합해서 조선의 독립을 실현시킬 것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14일 이찬우는 동급생 성원경에 대하여 상기한 협의사실을 설명하고 결사조직에 가입할 것을 권유, 그의 승낙을 얻음으로써 주동한 상기 6명과 성원경은 동일 춘천군 춘천면 전평리(현 춘천시 근화동 2구)수원지 부근의 강변에서 회합하고 한민족의 비참한 현실에 감안하여 하루 속히 조선 독립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동일 오후에는 다시 동읍 소양통 이정목(현 소양로 2가)소재의 백흥기 거소로 회합장소를 변경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한 끝에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제국으로부터 이탈 독립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상록회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위 원 장 조 규 석
부위원장 남 궁 태
선전부장 이 찬 우
서적부장 백 흥 기
회 계 용 환 각

상록회의 결사목적과 강령으로써 회원을 자기완성, 지도자로서의 책무완수, 단결력의 배양 그리고 조선민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빛나는 족적을 남긴 상록회의 태동이 비롯된 것이다.

(3) 상록회의 발전

상록회는 발족이래 제1단계로 민족주의적 문헌의 확보와 이의 독서권장운동을 전개하다 4월에 이르러 다시 회합을 갖고 상록회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동회의 서적부를 확대 강화하여 조선독립의 투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를 조직할 것에 합의하였고, 독서회의 조직 안을 남궁태, 조규현 양인으로 하여금 수립토록 하는 동시에 타회원은 각자 동지를 물색 입회하도록 권유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회원들이 단독 혹은 공동으로 동지규합에 나선 결과 배근석, 조흥환, 박규원, 이풍섭, 이병주, 임근호 등의 새로운 동지를 얻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들과 함께 상록회의 파생단체로서 독서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부서는
회 장 용 환 각
부 회 장 남 궁 태
서 적 계 회 계 배 근 석
으로 결정하였고 그 목적강령으로서 조선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참다운 조선인 양성, 회원의 단결심 배양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는 보다 많은 동지포섭의 필요에 따라 회원획득의 책임부서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제 5 학년 용 환 각
제 4 학년 배 근 석
제 3 학년 이 찬 우
제 2 학년 조 규 석
제 1 학년 남 궁 태

이후 동지포섭에 주력한 결과 단계적으로 또 다시 김홍기 차주환 서동철 윤근모 남익환 이연호 최기수 김련환 정인각 박일환 신기철 최상기 박태주 이영우 이창우 이철균 등이 가담하게 되어 바로 비밀조직이었을 망정 회세는 날로 번성하게 되었다..

(4) 상록회의 활동

상록회는 발족 이후 매월 정기적으로 봉의산정 등 비밀장소에서 월례회를 개최하고 스스로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는 연설회를 갖거나 민족주의적 문헌의 독후감을 발표케 하였으며 때로는 청년학도의 귀농운동과 조선독립을 획책하는 토론회를 갖기도 하였다. 아울러 상호 동지적 결속을 견고히 하는 동시에 수시로 모임을 갖고 독립자주 정신의 함양과 민족의식의 배양을 도모하였다. 또한 한때는 춘천농고, 함흥고보, 평양고보 및 서울의 제일고보와 제휴하여 레지스탕트로서의 공동전략을 펴기도 하였다. 또한 ‘조국의 광복은 농촌의 자립으로부터’라는 슬로건을 걸고 농촌계몽에 심혈과정열을 다 바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후진들에게 한국의 얼과 넋을 심어주기 위해 문헌을 통하거나 계몽을 통해 온갖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역경속에 서 애국사상과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후진양성에 진심갈력하던 상록회는 1983년 3월을 맞이하여 대부분의 동회 중심인물들이 졸업하게 됨에 따라 그 운영이 1년 후배이던 이연호, 최기수, 신기철 등에 인계되어 새로운 양상으로 그 사업이 계승되었다.
이 때의 역원은
회 장 이 연 호
부 회 장 최 기 수
서 적 계 신 기 철
회 계 박 일 환이었다.

상록회사업을 인계받은 후 신기철 등은 회원포섭에 진력한 결과 동급생 김정철, 이철균과 후배이던 전인목을 가입시켰고 얼마 후에 다시 신현억, 남극원, 이한진, 이봉채 등의 동지를 새로이 얻게 되었다. 이 무렵 간부진의 경질이 있어 회장겸 서적계에 신기철, 회계에 이철균이 선출되었다.

이들도 자주 모임을 갖고 조선어 상용을 주장하는 등의 민족주의 사상을 앙양하는 연설을 베풀었으며 우두산정 등에 비밀회합을 갖고 선배로서 이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홍채 신영철 등의 연설을 청취하는 등 졸업한 선배들에 못지않는 맹활약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부언하여야 할 것은 이미 졸업한 상록회원들의 움직임이니 상록회운동의 무대였던 모교는 일단 떠났으되 이들은 독립사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혹은 학창에서 또는 실사회에서 모교에 남아 자기들의 사업을 계승하고 있는 후배들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계속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졸업후 도만(到滿)하여 만주국 길림성 영길현 소재 공립국민우급학교(公立國民優級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이찬우 백흥기 등은 만주지방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의 거성 이동산(李東山) 선생 등과 연결을 맺어 모교에서의 상록회운동을 더욱 그 폭을 넓게 하였다. 이처럼 상록회운동은 그 폭과 깊이를 더 하면서 점차 조국광복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나갔으니 참으로 20대 전후의 젊은 청년들로서 장하고 훌륭한 일이었다.

(5) 상록회의 종언

2년여에 걸쳐 일경의 눈을 피해 다니며 지하활동을 전개하던 상록회의 장거는 마침내 1938년말 일경에 채지(採知)되어 관련자 137명이 피검되었고 36명이 송청되어 6개월씩의 미결 구류 끝에 이중 주동자 12명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언도판결이 있었다. 남궁태 이찬우 문세현 용환각 백흥기 조규석 배근석 조흥환 이연호 신기철 … 각 징역 2년 6월 전홍기 차주환 … 각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이리하여 10명의 형집행자는 눈물을 머금고 복역하던 중 불행히도 백흥기군은 일경의 악독한 고문이 화단되어 20세란 다하지 못한 한을 품은 채 옥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2년씩이나 일경의 날카로운 감시망을 피해 그것도 조직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던 상록회운동은 당시 세인을 놀라게 하였으며 일제의 압정에 지칠 대로 지친 이 민족에게 결심의 박수를 치게 하는 동시에 청량제적인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